단상서재

2026년 7월 29일

1장. 재료마감표를 앱으로 만들 수 있을까

건축가가 설계를 끝내고 납품할 때는 근사한 도면만 내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재료마감표와 스펙북이라는 두꺼운 서류가 함께 따라간다. 이 벽은 무슨 재료로 마감하고, 저 자재는 어떤 규격과 방법으로 시공해야 하는지를 세세하게 규명한 문서다. 도면이 공간의 뼈대와 위치를 보여준다면, 이 문서는 그 공간이 어떤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증명한다.

삼십 년 동안 프로젝트마다 이 서류들을 만들어왔다.

형식은 언제나 정해져 있고, 들어가는 항목도 대개 반복된다. 대부분의 현장에 쓰는 자재들은 지난 현장에서 썼던 것과 규격도 시공법도 같은것이 많다. 그런데도 매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처음부터 다시 만든다. 지난 프로젝트 파일을 열어 복사하고, 이번 현장에 맞게 문장을 고치고, 빠진 항목을 채우고, 바뀐 자재를 찾아 넣는다. 그러다 보면 꼭 어딘가 한구석에는 지난 현장의 이름이 유령처럼 남아 있곤 했다. 이걸 삼십 년 동안 반복하고 있노라면 문득 깊은 회의감이 밀려온다. ‘이건 사람이 지니고 해야 할 숙명이 아닌 것 같은데.’

해가 바뀌기 직전인 2025년 12월, 나는 오랜 회의감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처음 시도한 방법은 우스울 정도로 원시적이었다. 챗지피티(ChatGPT)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모니터에 떠오른 코드를 복사해 윈도우 메모장에 붙여넣은 뒤 HTML 파일로 저장했다. 전문적인 개발 도구 따위는 알지도 못했다. 여러 코드 파일이 서로를 참조하고 연결된다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그저 AI가 내준 통째의 코드를 파일 하나로 저장해 브라우저로 열어보는 식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하게도, 그렇게 만들어진 웹페이지가 모니터에 하얗게 띄워졌다. 마침내 화면에 첫 구동 화면이 떴을 때의 생경한 감각. 이것이 진짜 될 거라 믿고 시작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정말로 눈앞에 펼쳐져서 놀란 것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딸이 커서(Cursor)나 VS Code 같은 툴을 써보라고 권했다. 개발자들이 쓰는 전문 편집기라 했다. 받아 설치하고 프로그램을 열었다. 화면이 어지럽게 여러 칸으로 쪼개져 있고 칸마다 까만 바탕에 빽빽한 글자가 적혀 있는데, 도무지 어디를 클릭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새로운 파일 하나 만드는 단계에서부터 막혔다. 몇 번 버튼을 서성이다가 조용히 프로그램을 닫아버렸다.

길을 일러준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그 길로 들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을 실패라 부를 이유는 없다. 도구가 나빠서도, 내가 유난히 무뎌서도 아니다. 다만 그 화면은 처음부터 코드를 직업으로 다루는 사람들을 위해 설계되어 있었고, 나는 그 자리에 앉을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수많은 이들이 바로 이 첫 번째 문턱에서 고개를 저으며 돌아선다. 만들고 싶은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처음 마주한 도구의 차가운 익숙함에 압도당해 그만두는 것이다.

해가 바뀌고 1월 초, 유튜브를 탐색하다 우연히 안티그래비티(Antigravity)라는 도구를 접했다. 개발자들의 코딩을 돕는 도구라는데, 튜토리얼 영상 속 화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두 가지 특징이 눈에 꽂혔다.

하나는 눈으로 따라 하기가 무척이나 직관적이었다는 점이다. 메마른 설명서를 읽는 것과 누군가 실제 작동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어디를 눌러 창을 열고, 여기에 무슨 명령을 적는지를 영상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나니, 내 모니터에 같은 화면을 띄웠을 때 덮쳐오던 묵직한 두려움이 한결 커져 나갔다.

다른 하나는 챗지피티와 제미나이(Gemini), 클로드(Claude) 같은 내로라하는 AI 모델들을 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바꿔가며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그때는 그 기능의 진가를 몰랐다. ‘여러 개를 골라 쓸 수 있으니 다다익선이겠거니’ 하는 덤덤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뒤, 이 소박한 선택이 나를 벼랑 끝에서 구해주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침내 손에 맞는 도구가 쥐어지자,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는 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확했다. 바로 재료마감표와 스펙북이었다. 삼십 년 동안 가슴 한구석에 묵혀두었던 숙원을 비로소 직접 만들어볼 기회가 왔으니 순서를 잴 이유가 없었다.

스펙북부터 조심스레 뼈대를 세워갔다. 그런데 하나를 완성해가다 보니 자연스레 그 옆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축 현장에서 매일 일어나는 공사 기록과 관리를 담아낼 기능이 필요해져 덧붙였다. 그것에 '필드로그(FieldLog)'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현장 도면을 화면으로 직접 띄우고 자유롭게 확대해 볼 기능이 필요해 도면 뷰어를 제작했다. 이어 창호 도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는 앱도 살처럼 붙였다. 하나를 만들면 그 곁에 서야 할 다음 조각이 눈에 보였고, 이제는 만들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 망설임 없이 만들어 나가는 선순환의 흐름이었다.

그렇게 덩치가 커지고 나서야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줄 이름이 절실해졌다. '스펙북'이라고 부르기엔 이미 스펙북이 전체 시스템의 작은 일부분으로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Buildstories(빌드스토리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근사한 이름을 먼저 걸어두고 거기에 맞춰 건축을 올린 것이 아니라, 일단 필요에 따라 짓다 보니 부를 이름이 필요해 나중에 얹어준 간판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이 소박하고 유기적인 순서가 그 뒤로도 나의 개발 여정 내내 반복되었다. 먼저 실제적인 필요가 절실히 존재하고, 만들 수 있는 동력이 갖춰지면 묵묵히 빚어내고, 다 빚어낸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정리하는 순서. 삼십 년 동안 손으로 꾹꾹 눌러쓰던 문서 한 장이 바로 그 위대한 항해의 서막이었다.